
『랑종』은 2021년에 개봉한 공포 스릴러 영화다. 태국의 이산 지역을 배경으로, 여자들에게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한 무당 가문의 기이한 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기획·제작하고, 『셔터』와 『피막』을 연출한 반종 피산다나쿤(บรรจง ปิสัญธนะกูล, Banjong Pisanthanakun)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개인적으로 『랑종』은 나홍진 감독의 다른 작품인 『곡성』과 함께 보았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하나의 시리즈처럼 느껴지며,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더라도 두 작품에서 구현되는 공포의 맥락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세 개의 주요한 흐름이 교차한다고 보인다. 첫 번째는 ‘무당’, 혹은 ‘랑종’이라 불리는 존재로, 외부와 내부 사이에 위치한 ‘님’의 흐름이다. 두 번째는 일상성을 대표하면서 그 일상 속의 특별함을 드러내는 ‘노이’, ‘마닛’, ‘팡’의 흐름이고, 마지막은 평범함에서 특별함으로 강등되는 ‘밍’의 흐름이다. 이 세 흐름은 뒤섞이며, 결국 마지막에 하나의 동물적 물질성으로 충돌하고 혼합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화는 평범함 속에 잠재된 기이함과 외부성을 끌어냄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영화의 제목인 ‘랑종’(ร่างทรง, Rang Zong)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신내림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로 인해 드러나는 일상의 기괴함을 통해 동물과 인간, 영혼과 물질 세계 사이의 매개, 그리고 그동안 무시되어 왔거나 감지되지 않았던 일상성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님’과 이산 지역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시작한다. 조상신 ‘바얀’을 모시는 무당 님은 카메라의 시선 안에서 무당이라는 능력을 지닌 것 외에는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시골의 외진 길가, 화려하지 않은 2층 건물에서 혼자 살아가며, 무당 일을 하면서 옷 수선으로 생계를 잇는다. 그녀의 삶은 무당이라는 직업이 수입원이라기보다는 ‘바얀’을 섬기는 순수한 행위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반면, 그녀가 바얀에게 올리는 제사의 모습은 그 문화적 이질성과 시각적 강렬함으로 인해 그녀의 일상, 즉 평범하게 일을 하고 특별한 복장을 하지 않는 모습과 충돌하며, 말을 아끼는 그녀의 성격과 함께 외부적 특별함과 일상성 사이에 위치한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무당은 인류 역사에서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자이자 신의 의지를 물질 세계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무당은 인간과 신의 경계에 위치하며, 물질과 비물질을 동시에 보는 자, 인간과는 다른 동물성에 가까운 순수한 물질체로 인식되어 왔다. 님의 사회적 위치는 가족 내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형부 위롯과도 특별한 교류 없이 살아가며, 속세의 삶을 유지하는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바얀의 존재를 "보지 않아도 믿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곧 특별함을 평범함으로 강등시키는 인물로서의 그녀의 위치를 부각시킨다.
님과 대비되는 인물들은 속세의 일상성을 대표하는 노이, 마닛, 팡이다. 그들은 일상의 모습 속에 기괴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영화가 절정으로 향할 때까지도 일상 속에 머무른다. 그 도피적 시선은 "모든 혼", 즉 혼의 동물성과 일상의 비물질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힘을 제공한다. 노이는 님의 언니이자 바얀의 부름을 처음 받았던 인물로, 극도의 거부와 동생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일상성을 지킨다. 그러나 그녀의 평범한 삶은 처음부터 특별함 위에 위태롭게 구축된 것이었다. 노이 가족을 다룬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의 기묘함이다. 영화 초반,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노이와 짧은 인터뷰를 진행한다. 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그녀가 운영하는 불법 개고기 가게를 무심히 뒤편에 배치하면서 이중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집 안에서는 ‘럭키’라는 반려견을 기르면서도, 자신의 삶 바깥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물질, 혹은 비물질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은 무심한 카메라의 시선 안에서 이상성의 단면을 포착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카메라의 시선은 노이와 닮아 있다. 신의 시선과 같은 모든 것을 포착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이 시선은, 꿈이나 메시지로 끊임없이 개입하는 바얀과는 다르다. 제작진은 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닛은 아내인 팡과 어린 아들 퐁을 두고 젊은 여성들과 술자리를 가진다. 성당의 예배는 일상의 배경 중 하나로 지나치고, 밍의 부자연스러움은 하나의 의식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모든 과정 속에서 밍은 순수한 강도를 드러낸다. 그녀는 단지 악귀에 씌인 인물이 아니라, 환경을 반사하는 거울이며, 주변에 있던 동물성을 중심으로 이끌어오는 또 다른 형태의 랑종이다. 님과 카메라가 시선으로 외부성을 매개한다면, 밍은 행동과 언어로 그것을 실현한다. 영화 초반, 밍은 매우 평범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젊은 여성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운명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신내림을 거부하지만, 두려움과 함께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외부에 있던 님이 내부로 들어오는 것과는 반대로 밍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하며 양자를 모두 폭발시킨다. 밍이 가장 먼저 파열시키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하혈과 자해를 통해 신체를 파열시키고, 감정을 분노로 집중하며, 무차별적인 성관계를 통해 동물성을 방출한다. 역사 속 미신적 여성성과 강한 시각적 연관을 갖는 이 행위들은 성적 충동보다는 동물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녀의 기행은 노이와 마닛으로 대표되는 가족 전체의 기괴함으로 확산된다. 영화의 말미, 퇴마사가 설명을 덧붙이긴 하지만, 밍의 상태가 심각해져도 이를 증언하는 인물은 없다. 그러나 증인은 존재한다. 모두가 증인이자 행위자이며, 카메라와 님 또한 상황을 목격한다. 결국 마지막 순간, 모든 인물들은 랑종이 된다. 더는 님만이 랑종이 아니며, 오히려 그녀는 그 역할에서 벗어난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언급되는 동물성, 외부성, 특별함은 무엇인가? 왜 이 영화는 외부와 내부의 철저한 교환을 이토록 폭력적으로 그려내는가? 많은 공포 영화들은 일상에 침투하는 외부에 대한 공포를 다룬다. 그것이 귀신이든, 인간성이 결여된 괴물이든, 혹은 내재되어 있던 강등된 특별함이든, 이들은 모두 인간 심리에 존재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성’을 자극한다. 이 예측 불가능성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동물성이다. 논리와 인과를 벗어난 존재들, 사회와 자연 사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 그것은 특이하며, 예측할 수 없고, 이해되거나 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랑종』에서의 동물성은 산재한다. 동시에 그것은 철저히 분리된 시선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몸을 통해 드러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순간,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랑종이 된다. 비록 영화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있을지라도, 진정한 외부와 내부, 허구와 실제의 분리는 끝내 파열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공포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심층적으로 침투하지 못한다. 시각적으로 잔혹한 장면들은 화면 너머를 뚫지 못하고, 심리적 긴장감은 오히려 시각적 동물성에 의해 희석된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일 수도 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실제 위험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개된 위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증인이 되며, 그 자체로는 증언하지 않는다. 특별함의 강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