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이 글은 아트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대화를 통해서 느낀 점들, 아트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화에 대한 글이다.

어제 사진, 퍼포먼스 전공의 지인들과 잠시 대화를 했다. 라이브 퍼포먼스, 특히 신체 변형과 이생명체 되기 (정식 명칭이 있을 것 같지만 내가 잘 모르므로 그냥 퉁쳐서 변형적 수행이라고 부르도록 하자)에 대한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는 S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로 궁금증을 일으켰다. 가장 첫번째로 궁금했던 것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퍼포먼스였다. 하나는 집단적이고 전통적이며 ritual 성향이 있는 방식으로 예시 중 하나는 아래

Romania’s new year bear dancers – Alecsandra Raluca Drăgoi’s best photograph
‘Boys and men put on heavy bear costumes, often made of real fur, and make their way to a stage – where a Gypsy with a knife cuts them open to let a demon out’

다른 하나는 개인적이고 특정적인 방식의 행위로, 예시는 아래.

Japanese man lives dog’s life in long-haired collie suit – in pictures
Man known as Toco has spent over £10,000 on a canine costume to realise his dream of transforming into a dog

그리고 나의 질문은 좀 더 두번째 방식, 개인적이고 특정적인 것이 있었다. Collective 수행에서 곰, 호랑이, 혹은 용의 경우 (물론 용이 상상으로 만들어진 개념적 형태라는 점을 제외하고라도) 퍼포먼스 안에서 수행될 때 그것은 동물의 형태 혹은 형식을 닮은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여겨지기를 요구받는다. 이것은 공동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수행이며 공동의 약속과 합의가 그 무언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행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정적인 것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사회문화 안에서 이 행위를 받아들여야할까? 혹은 이러한 지점이 S가 주장했듯이, 신체를 몸을 변화시킬 권리와 연결될 때, 이러한 collective agreement에 대한 질문이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분명 최근에도 많은 담론들이 진행중인 identity안에 위치할 수 있지만, 더 커다란 문맥 속에서 혹은 다른 문맥 속에서 위치시킬 경우, 이것은 미학적 질문으로, 미학의 물질적 질문으로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회화에 임의의 흔적들을 남겼을 때 그 "임의의 흔적 random mark"는 다른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남긴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위의 "임의 흔적"과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은 David Sylvester가 베이컨에게 던진 것으로, 베이컨은 이에 대해 figuratively 현실의 "닮음"과 이어지지 않는 것은 같지만 임의의 누군가가 임의로 흔적을 남긴 것에는 그 이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다른 점이라고 대답한다. 즉, 그의 대답 속에는 무엇이 아트인가 아트가 아닌가에는 그 행위의 이유, 의미, 그리고 그에 대한 수행이 연결되며 아무리 그 형태가 같더라고 하더라도 그 흔적이 "수행"으로 기능하는 한 두 행위는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길게 돌아왔지만, 나는 그렇기에 변형적 수행에서 그 의미는 중요하고 그 의미는 아무리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전달되기 위한 것이므로 사회문화, 즉 밖으로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혹은 의미가 들어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진을 하는 A는 공동의 약속이 있어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공동의 약속"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대화해 볼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둘 다 그 지점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사실 둘의 집중을 한 곳으로 가져오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A는 연극은 Fine Art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공동의 약속이 없어도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연극은 commercial 하기때문에, 퍼포먼스가 아닌 액팅이기에 파인아트가 아니라고 하는 점은 분명 모순된 지점이 아닌가? 나는 이 점에 대해, 만약 연극적 형식으로 퍼포먼스를 한다고 해도 파인아트가 아닌가? 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퍼포먼스도 연극 전공도 아닌데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공동의 약속" 혹은 문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행위가 아닌가?

길게 열심히 떠들어댄 것치고 S나 A나 나나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사실 저 이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파인아트 전공의 한 명 정도가 더 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대화를 끝내면서 사진 전공의 A에게, 너의 이야기는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때 사진이 아트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담론과 닮아 있다. 니가 말하는, 연극은 파인아트가 아니다, 라고 결론 내려버리는 것은 마치 그때 사진은 reproduction이기 때문에 아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뭐가 다르냐고 지적했다. A가 사진 예술을 하는 사람이기에 노리고 한 공격이긴 했다.

결론은 뭐 답은 아무도 모르지 뭐 로 끝났지만, 나는 사실 이 질문이 언제나 흥미로우며 개개인의 정의가 다르기에 끝나지 않을 대화라는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정의는 "약속"되고 "교류"되며,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접혀"가게되는 것이니 이러한 대화가 아주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다음에도 또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