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 1982년 1월 6일 강의 전반부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1982년 1월 6일 강의 후반부 pp. 64 - 79
데카르트 이후 17세기까지
철학과 영성에 대해, 또 자기 배려 개념이 배제된 것은 ‘데카르트의 순간’에
“데카르트가 인식을 위해서는 철학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때, 또 인식이 한계가 있다면 이 한계는 전적으로 인식 주체의 구조 내에. 다시 말해서 인식을 허용하는 바 내에 있다고 말하면서 데카르트를 보완했을 때” (p. 64, fn)
결정적으로 단절되었지만 이러한 점진적 배제는 오랜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신학은 합리적 성찰을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고 동시에 보편적 인식 주체의 원리를 기초하는 두가지 진행의 중간에 존재한다. 여기서 인식 주체의 완결 지점은 “신”.
이는 점진적으로, 5세기말부터(성 아우구스티누스부터) 17세기까지 과정을 통해 배제되었다:
- 한편으로 오직 인식 주체를 통해 시행되는 진실 접근과
-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변형 시키고 진실로부터 계명과 변모를 기대하며 주체가 자기 자신에 가하는 작업의 영적인 필요성을 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진행
모든 것을 다 아는 신과 신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주체의 일치 (p.65)
16세기말과 17세기 초를 특징짓는 흥미로운 개념 스피노자의 ‘오성의개혁’
스피노자의 진실 접근의 문제에 대한 주체 존재 문제와의 긴밀성에서 찾을 수 있는 영성의 문제 (p. 66):
- 요컨대 내 주체 존재 자체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하는가?
-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나는 주체 존재에 어떤 조건들을 부과해야 하는 것일까?
- 그리고 어떤 한도 내에서 이 진실 접근이 내가 찾고 있는 바, 즉 지고의 선을 줄 것인가?
이를 통해 영서의 구조들이 철학적 성찰과 지식으로부터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헤겔에 있어서는 찬양되기까지 했던 영성 문제는 “인식—인식 행위—은 영성의 요청과 연관되어 있었” (p. 67) 다.
19세기 철학사 전반은 데카르트 이후로, 아무튼 17세기 철학 이래로 영성의 구조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던 철학의 내부에서 영성의 구조들을 재성찰 하기 위해 가한 일종의 압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p. 67)
17세기 영성의 구조로부터의 해방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과 19세기 영성의 구조에 대한 재성찰 사이의 심층적인 적대성. 그리고 마르크시즘이나 정신분석학의 지식의 중심부와 원리 그리고 귀결점에서 진실에 접근한다는 사실 때문에 주체가 변형되는 부분에서 영성 특유, epimeleio heαutou, 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epimeleia heαutou = 자기 배려
-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
-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
-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
하지만 두 유형의 지식 모두 명확하게 영성의 문제에 대해 숙고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이를 다수의 사회 형식들 속에 은폐시키려고 시도했다.
‘주체와 진실’의 문제를 단체, 학교, 당, 계급 등과 같은 것에의 소속 문제로 몰아가기 때문에 결국 주체와 진실 간의 관계의 망각을 당연히 대가로 치르게 됩니다. (68)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중심을 주체와 진실의 문제로, 역사적 영성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용어로, “분석적 지식의 용어로 영성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제기하려고 시도”하고 이동시킨 유일한 사람이었다.(68) 그리고 이를 통해서 자기 배려를 부할시킨다.
다시 돌아와서
epimeleio heoutou의 출현, 황금기, 이행기
- 출현: 소크라테스-플라톤
- 기원 후 1–2세기: 자기 양성과 자기 배려의 황금기
- 기원 후 4–5세기: 고대 이교문명의 철학적 저기 수련에서 기독교 금욕주의로의 이행
출현기
주 참조 텍스트: 알키비아데스라는 제목의 대화편 후반부
이 자기 돌보기의 출현은 사실이지만 조언, 철학자를 위한 명령 원래 등등이 아닌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그리스 문화, 특히 스파르타의 오래된 금언이자 원리로 존재했다.
스파르타인 알렉산드리데스의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스스로의 토지를 소유하면서도 경작을 맡긴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단언이 정치적 특권과 관련된 생활 형식, 특히 귀족 계급의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특권과 연관된 원리였다는 것이다.
Alcibiades Being Taught by Socrates, by François-André Vincent (1776)
소크라테스의 <<알키비아데스>>에서도 스파르타의 이런 기본적 이해가 표현된다. 알키비아데스는 특권적 위치에 있었으며 능력으로도 외모로도 출중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접근한 이유에는 그보다 다른 것, 즉, “그는 백성 쪽으로 관심을 돌려 도시국가 아테네의 운명을 담당하려 하고, 타인들을 통치하려고 생각” 했으며 그가 더 소유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특권적 지위. 신분적 특권을 정치적 활동, 타인들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로 변환시키려 하는” (73)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타자들의 통치(즉erôs 이후: polis, 도시국가) 쪽으로 방향 을 돌리는 순간, 바로 이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이제 알키비아데스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73)
즉, 특권이 타자들의 통치로 변형하는 순간에 자기 배려가 탄생한다 → 스파르타의 특권적 토지 소유를 노예에게 경작을 맡김으로 자기 배려가 시작된다는 점과 일치한다.
다른 예시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와 젊은 샤르미데스와의 대화의 인용, <<기억할 만한 일들>> 3편에 따르면, epimeleisthoi heoutou 혹은 epimelei soutou 대신 Nonn Prosekhei 영어로 “Pay attention to your mind”, 한국어로는 “마음(또는 정신)에 주의를 기울여라” 를 사용한다.
(그리스어 텍스트: “allα diαteinou mollon pros to seαutô prosekhein”, “But strive rather to pay attention to yourself,” ”그러나 오히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라.")
다시 알키비아데스로 돌아와서, 알키비아데스가 적들보다 부족한 부와 교육을 보충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충할 앎, 즉 “별다른 열세 없이 적들과 대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인 앎, tekhnê” (75, 79쪽에서는 기술라고 번역되며 나 또한 앎보다는 기술 방법에 더 가깝다고 생각) 이 그에게 없다는 말이다.
“걱정하지 말게, 수치스러운 무지 속에 있다는 것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50세에 깨달았다면 그것을 치유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배려를 한다는 것(epimelêthenαi Sαutou: 너 자신을 배려하기)이 어렵기 때문에. 하지만 너는 그것을 깨달을 적정한 나 이에 있다.
소크라테스의 <<알키비아데스>>에서 알 수 있는‘자기 자신을 배려하기’ ‘자신을 배려의 대상으로 취하기’
- 자기 배려의 필요성은 권력 행사와 연관되어 있다 → 스파르타의 자기 자신을 돌보기는 권력의 신분적 환경의 결과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의 문제는 부유하고 전통적인 대가족과 같은 신분적 특권에서 한정 된 정치 행위, 아테네의 실제적 통치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등장 → ‘자기 자신을 돌보기’는 타인들에게 정치 권력을 행사하려는 개인의 의지에 내포되어 있고 또 거기로부터 연역됨 → 자기자신의 배려 문제는 정치 행위로의 변환 혹은 합리적 행위로의 변환과 연결된다.
- 자기 배려 개념과 자기 배려의 필요성이 알키비아데스의 교육 결함과 연관되어 있음.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 배려를 하도록 독려하는 이의 부재.
- 교육자의 휘하에서 벗어나 (erôs나이에서 벗어나) 정치 활동을 하는 시기에 접어든 비판적 나이에 자기 배려를 배워야 한다 → 즉 스승-젊은이들 스승-연인 간에 행위
자기 배려의 중대한 변환점: <<알키비아데스>>에서는 젊은이의 교육에 있어 필요성에 대한 논의였던 자기배려가 “에피쿠로스철학, 스토이철학과 더불어 자기 배려가 모든 개인의 실존 전반에 걸친 항구적인 과제가 되어 버렸을 때 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 (78)가 되었다.
-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 정치 활동이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무지.
그는 무엇이 흘륭한 다스림의 대상인지 몰랐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배려해야 합니다. (78)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정밀하고 난해하며 중요한 “자기 자신을 돌본다”라는 말에서 “자기”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 주체의 문제 =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란 무엇일까요?”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첫번째 질문은
내가 다스려야 할 타자들을 적절히 배려하기 위해 내가 배려해야 할자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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